맨위로가기

1992 K리그 드래프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92년 K리그 드래프트는 1991년 드래프트에서 불거진 드래프트 거부 파동의 여파로 시작되었다. 홍명보와 황선홍의 포항 입단 파문, 올림픽 대표 선수들의 집단 드래프트 거부 선언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드래프트 신청 기한 연장과 홍명보의 신청으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트레이드 파동이 이어졌다. 결국 홍명보, 신태용, 임근재 등 신인 선수들이 1992년 K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 드래프트 거부 파동과 진통

1991년 드래프트에서 촉발되었던 드래프트 거부 파문의 여진은 이듬해인 1992년 드래프트까지 이어졌다. 당시 드래프트 거부 파문은 K리그 드래프트 역사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사건이다.

2. 1. 홍명보와 황선홍의 포항 입단 파문

1991년 4월, 6개월 전 파문의 주인공[1]이었던 황선홍, 홍명보 두 선수가 동시에 포항 제철에 입단하면서 2차 드래프트 거부 파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포항 제철은 아마추어 축구팀으로 선수를 입단시킬 경우, 드래프트에 신청하지 않은 선수도 입단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황선홍과 홍명보를 포항 소속으로 입단시키는 편법을 동원했다. 이는 아마추어 입단자의 프로 승격은 3년 동안 해당 아마팀에서 뛴 후에야 가능하다는 규정상 지금껏 어느 팀도 쉽게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 호랑이를 비롯한 타 구단들은 포항 제철의 행태를 조항 위반이라고 격렬히 반발했으며 사태는 점점 확산되었다. 특히 포항 제철이 입단과 동시에 황선홍, 홍명보 모두 출전 불가 기간인 3년 동안 해외 축구 유학을 보내겠다고 언론에 발표하면서, 이 추문은 일반 축구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선수 권익을 무시하는 기업 구단의 담합 행태에 대한 고발 기사와 성토도 쏟아졌다. 결국 1991년 7월, 각 구단 단장들은 회의를 거쳐 기존 드래프트 1순위, 2순위 계약금을 각각 3000만, 2500만에서 5000만, 4000만으로 상향 조정하였고, 황선홍은 포항 제철의 공언대로 독일로 진출하면서 포항 제철 입단 파문은 어느 정도 포철의 판정승으로 가라앉는 듯했다.[2]

2. 2. 올림픽 대표들의 집단 드래프트 거부 파동

1991년 10월, 2차 파동 6개월여 만에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당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표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당연히 1992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 최우선 지명이 확실시되었던 서정원, 신태용, 정광석, 김병수 네 명의 선수가 드래프트 거부를 선언한 것이었다. 서정원 선수를 필두로 4선수는 구단 간의 공공연한 담합으로 계약금의 자유경쟁이 아닌 5000만 상한선 책정에 그쳤음을 성토하면서, 드래프트제의 폐해를 고발하고자 거부를 선언했노라고 밝혔다. 이 때를 같이해, 당대 대학권의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김정혁 선수가 대우 로얄즈와 비밀리에 선계약을 맺고 대우 선수단에 합류했다는 소식과 홍명보 선수와 황선홍 선수에게 포철이 각기 지급한 계약금이 1억 원을 넘긴다는 소식을 다룬 폭로성 기사가 쏟아지면서 화살은 K리그 구단 전체와 드래프트 제도에 집중되었다. 여기에, 다른 선수와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의 안위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들어, 주요 선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요컨대, K리그의 팀과 구단주, 선수들 모두가 자정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다.[1]

2. 3. 드래프트 신청 추가 기한 연장과 홍명보의 신청

대한축구협회한국프로축구연맹은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 당시 '''팀 해체 불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과 K리그 이미지에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막기 위해, 올림픽 대표 4인방의 드래프트 거부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10월 중순에 완료되었던 드래프트 신청 기한을 드래프트 하루 전날인 11월 18일까지 연장하면서 수습했고, 구단주 협의회와 포항 제철 측과의 진통 끝에 홍명보를 1992년 드래프트에 내놓기로 합의를 얻어내면서 사태는 급진전되었다.[3]

결국 최종 마감일이었던 18일, 홍명보, 서정원, 신태용이 드래프트 신청을 완료하면서 포항 제철과 타 구단 간의 알력 다툼과 파문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계약금 상한선 폐지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3] 김병수 선수와 정광석 선수는 끝내 신청을 거부하면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임시방편적 해결은 결국 이틀 뒤 드래프트 지명장에서 벌어진 K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트레이드 소동으로 이어졌다.

3. 지명 결과

구단1순위2순위3순위4순위5순위6순위7순위8순위9순위
LG 치타스서정원김봉수임근재전경준
일화 천마김정혁주용국김학철김대진
유공 코끼리홍명보이종철김기선윤정춘
포항제철 아톰즈김진형조정현류영록장영훈백태현김종록정성훈이상기강영호
현대 호랑이김종건김동식김판곤배수현김성구장형석민병직임채용김병지
대우 로얄즈이태홍신태용김태진이경춘최영희이진호유원민최광운


4. 트레이드 파동

1991년 11월 19일 드래프트 지명 이후, 포항제철, 대우 로얄즈, LG 치타스 등 여러 구단들이 주요 선수 확보를 위해 트레이드를 진행했다. 이로 인해 드래프트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4. 1. 4시간 만에 소속팀이 바뀐 홍명보

1991년 11월 19일 드래프트 지명장에서 홍명보는 유공 코끼리에 지명되었다. 유공의 김정남 감독은 홍명보 영입에 만족감을 표시했다.[6] 그러나 불과 4시간 만에 상황이 급변했는데, 이미 홍명보에게 1억 원이 넘는 금액을 지불했던 포항제철은 홍명보를 반드시 확보하라는 윗선의 지시에 따라, 드래프트장에서 포철이 1순위로 지명한 김진형, 2순위 지명 조정현, 1991 K리그 드래프트에서 유공 1순위로 지명됐지만[4] 1991년 7월 김홍운과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포철 유니폼을 입은[5] 이석경을 한꺼번에 유공으로 내주고 홍명보를 데려오는 1:3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6]

4시간 전까지 홍명보 영입에 기뻐하던 김정남 감독은 트레이드 직후 침묵했고, 이는 위의 결정이 높은 선에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했다. 또한 포철과 유공 구단이 사전에 담합을 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한양대학교 측은 김진형 선수가 홍명보 선수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박대한다며 항의했고, 이후 한양대는 포항제철에 선수 공급을 거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포항제철은 홍명보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4. 2. 대우의 변칙 스카우트 추진

대우 로얄즈는 드래프트 실시 이전에 사전 접촉을 통해 김정혁 선수를 확보해두었다가 일화 천마에 빼앗겼다. 이에 포항제철이 홍명보를 데려온 것과 같은 방법으로 김정혁을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대우는 즉시 일화와 접촉하여 김정혁 선수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대우가 1순위로 지명한 이태홍 선수를 포함해 선수 몇 명을 내놓을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결국 12월 4일, 대우의 1순위 지명 선수인 이태홍과 2순위 지명 신태용을 일화에 내주고 김정혁을 받는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1]

4. 3. LG와 포철 맞트레이드

LG 치타스전경준을 4순위로 지명했지만 드래프트 며칠 뒤였던 1991년 12월 6일 골키퍼 차상광과 함께 포항 제철로 넘겼고, 이 과정에서 포항 제철은 수비수 손형선과 골키퍼 박철우를 LG로 넘기는 2:2 트레이드를 단행했다.[7]

5. 결과

1992년 드래프트 사태의 원인은 역대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과 1991년 코리아(남북 단일팀) 청소년 대표팀 주전 선수들이 대거 드래프트에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가대표가 덤벼도 1992년 드래프트 신청자 베스트 11이면 충분히 이길 것"이라는 농담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신인들의 실력은 검증되었던 바, 지명을 위해 그토록 편법을 동원해서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1]

이러한 뜨거운 열기 덕분인지 1992년 신인들은 지명 당시의 혼란스러움과는 별개로 활약은 대단했다. 1992시즌 홍명보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K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K-리그 신인왕신태용이, 득점왕임근재가 차지하며 신인들이 타이틀을 싹쓸이하는 모습을 보였다.[1]

대우 로얄즈는 김정혁을 어렵게 데려왔으나, 부상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최하위권으로 추락했고, 오히려 일화에 내준 신태용, 이태홍의 활약을 보며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홍명보를 빼앗긴 유공 코끼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1]

참조

[1] 문서 1991 K리그 드래프트
[2] 문서 홍명보
[3] 문서 리베이트
[4] 뉴스 수비왕 趙(조)우석 일화로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2019-03-05
[5] 뉴스 50경기 마친 프로축구 판도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2019-03-05
[6] 문서 1993 K리그 드래프트
[7] 뉴스 GK 朴哲佑(박철우)-車相光(차상광)등 포철-LG 맞트레이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8-06-3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